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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와 글

(강낭콩) 에드몽 드 세샹(조그마한 영화 같은 사진책)

by 청개구리! 2022. 4. 26.

(강낭콩) 에드몽 드 세샹(조그마한 영화 같은 사진책)

조그마한 영화 같은 사진책
(강낭콩) 에드몽 드 세샹
사진책 (강낭콩)은 에드몽 드 세상 님이 ‘연출해서 엮은’ 이야기입니다.

(강낭콩)
노부인은 기나긴 세월을 어두컴컴한 빌딩에서 살아왔습니다.
거기서 자기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낡은 재봉틀 앞에 구 부정히 앉아 일을 합니다.
진주 같은 구슬로 곱게 수를 놓고 은색 술을 달아서 흰색 금색 핸드백들을 만듭니다.
축제의 밤에 멋쟁이 아가씨들이 들 눈부신 이브닝 백들을.

매일 아침하고 저녁에는, 노부인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은 오후에는, 잠시 실패를 치우고서 재봉틀을 닫습니다.
그리고 은발 머리에 구식 모자를 쓰고 핸드백- 수수한 핸드백 - 을 들고서 밖으로 나갑니다.

노부인은 여러 해를 두고 똑같은 길로 산책을 다닙니다.
항상 자기가 사는 데서 그리 멀지 않은 뛰레리에 공원을 둘러 오지요.
시끄럽던 도시 소음도 가라앉아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간에 공원을 거닐기를 좋아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잘도 꾸며 놓은 화단 둘레를 천천히 돌면서,
노부인은 어린 시절의 정원을 마음속에 그려 봅니다.
작약과 라일락 향기가 가득하던, 이제는 사라지고 잊힌 그 옛 정원의 모습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부인은 꽃가게 앞에서 언제나 발길이 머뭅니다.
거기엔, 자기는 꿈에도 사 보지 못할 아름다운 꽃들이 하나 가득 있습니다.
노부인은 한참 동안 서서 꽃을 바라보며 향기를 맡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을 하러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갑니다.

어느 날 저녁, 노부인은 신문 꾸러미와 빈 병들을 모아 둔 옆에서 버려진 화분 하나를 봅니다.
부인은 그 화분을 집어 듭니다.
진달래가 심겨 있습니다. 아니, 그랬었습니다. 나무는 죽었습니다.
까맣게 말라죽은 줄기 몇 개만이 흙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흙이 좋고 화분도 쓸 만하기에,
노부인은 신문지로 화분을 싸 가지고 위층으로 가져갑니다.
꽃화분이라. 흙도 담겨 있고. 잘됐군. 화분을 꼭 껴안는 노부인의 눈이 빛납니다.

방으로 온 노부인은 포크로 죽은 진달래를 캐닙니다. 연장이라고는 그것뿐이니까요.
그런 다음, 납작한 구리 냄비에서 저녁 식사 때 쓰려고 골라 놓은 흰 콩 중에서 하나를 꺼냅니다.
제일 동그랗고 좋은 것으로.
노부인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분에 담긴 흙에 작은 구멍을 냅니다.
뜻밖에 받은 좋은 선물인 이 값지고 소중한 흙에.
그리고 그 구멍에 정성스레 콩을 심고서 흙을 덮습니다. 노부인은 씨앗에 물을 줍니다.
그러고는 화분을 창틀 밖으로 내놓습니다.

날마다 노부인은 잊지 않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그런데 몇 주일 지난 어느 날 아침, 노부인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강낭콩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거의 매시간마다, 노부인은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자기 화초를 바라봅니다.
초록 잎사귀가 두 잎이 나오더니, 이내 셋째 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처럼 희망차게 시작한 지 며칠도 안 되어,
어린 강낭콩은 흙에서 솟아오르느라고 기진맥진한 듯 곧 잎이 시들기 시작합니다.
 '강낭콩이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노부인은 뜨개질바늘을 찾아다가 흙에 꽂습니다.
그러고는 털실로 강낭콩 줄기를 대바늘에다 붙들어 매어 줍니다.

그것만으로 넉넉지가 못합니다. 종종 아침 열 시 전에,
위층에 사는 사람이 창문에서 담요를 야단스럽게 털어 댑니다.
건강에 해로운 먼지가 가득한 낡은 담요를 말입니다.
노부인은 더러운 먼지가 춤을 추며 강낭콩 위에 내려앉는 걸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봅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웃집 비둘기들이 그 화초에 홀렸나 봅니다. 이다금 가엾은 잎사귀를 쪼아 먹습니다.
노부인은 비둘기들을 쫒으려고 애쓰지만, 비둘기들이 좀 많이 와야지요?
 게다가 비둘기보다 끈질긴 건 세상에 또 없으니.

그렇다고 온종일 재봉틀에서 창으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햇빛이 모자라고, 담요에다 비둘기에다...
그래도 강낭콩을 살려야 합니다.
노부인은 강낭콩을 옮겨 놓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방안에는 햇빛이 넉넉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화분을 층계참에 내다 놓습니다. 처음에는 의자 위에다,
다음에는 바닥에다 번갈아 놓아 주며 화초가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지켜봅니다.

하지만 지구가 계속 도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분을 계속 옮겨 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강낭콩을 잊어버리고 돌보지 않게 됩니다.
때로는 방에서 층계참으로 들락거리며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개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지. 강낭콩이라고 안될 게 뭐람?'
그리하여 노부인은 자기의 어린 강낭콩을 데리고 공원으로 갑니다.
자기가 무얼 들고 가는지 아무도 모르게 화분을 가방 안에 숨깁니다.
뛰레리에 공원에는 햇볕도 좋고 물도 있지요.
노부인은 매일 벤치에 앉아서,
화초가 다시 파르스름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지켜봅니다.
하지만 이런 산책은 잠 깐뿐입니다. 일을 해야 하니까요.
어두운 빌딩에 돌아오면 강낭콩은 다시 병들어 보입니다. 잎이 축 늘어집니다.
부인은 어떻게 해 주어야 강낭콩의 병이 나을지를 모릅니다.
위층에 사는 이웃 사람은 계속 낡은 담요를 털어 대고,

호기심 많은 비둘기들도 끈질기게 날아옵니다. 창밖으로 올려다보면,
저 높이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밖은 여름인데도 어떤 방 안에는 여름이라고는 없으니.
매일같이 노부인은 자기 강낭콩의 잎사귀를 세고 또 셉니다.
좀처럼 늘어나지를 않습니다. 강낭콩은 시름시름 쇠약해져 갑니다.
그래서 부인은 결단을 내립니다.

어느 날 아침 아주 일찍, 노부인은 뛰레리에 공원에 갔습니다. 마침, 아무도 없습니다.
노부인은 손가방 안에 강낭콩과 작은 물병을 가져왔습니다. 재빨리 행동해야 합니다.
화분의 흙을 쏟은 다음, 화단의 작은 회양목 울타리 뒤켠에 빈 화분으로 구멍을 팝니다.
그리고 화사한 꽃들 옆 안전한 곳에 강낭콩을 심습니다.
병에 든 물을 준 다음, 아무 흔적도 안 남기려고 화분을 집어 듭니다.
노부인은 흐뭇한 마음으로, 그리고 조금 피곤해서, 잠시 벤치에 앉습니다.
그리고 쉽니다. 노부인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노부인이나 강낭콩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증시 부인 주위를 무심히 오갑니다.
아무도 모르게, 노부인은 화초 한 포기를, 하나의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그날 저녁, 밤이 되어 공원이 닫히자 노부인은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이제부터는 혼자 있게 될 그 방으로.
부인은 이내, 정들었던 그 작은 초록 잎들이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매일 조심스럽게 자기가 심은 화초를 보러 갑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갑니다.
강낭콩은 햇볕과 물을 듬뿍 머금고 기름진 흙에서 새 힘을 받아 이제 무럭무럭 자랍니다.

노부인은 강낭콩을 돌보며 이따금 잎을 닦아 줍니다.
아무도 그 강낭콩이 노부인의 것인 줄을 모릅니다.
희귀한 나무들과 화려한 꽃들 사이에 엉뚱하게 심긴 이 콩밭이 노부인의 비밀 정원입니다.
 자기가 이 콩을 구해준 것입니다.
그 콩이 자라는 걸 보는 것이 노부인의 보람이요, 달콤한 신비요, 위로요,
기쁨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노부인은 그 강낭콩을 생각합니다.
파리의 어딘가에 무엇인가 자기의 것이 있는 것입니다.

강낭콩은 잘도 자랍니다. 마치 지난날 못 자란 것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둣이,
너무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쑥쑥 자랍니다. 잎도 많아집니다. 꽃이 핍니다. 꽃이 씨가 됩니다.
이내, 강낭콩은 자기가 숨겨 주고 감싸 주던 회양목 울타리 위로 불쑥 올라왔습니다.
어느 날 - 아름다운 7월에 - 세 남자가 그 공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정원사와 매우 엄격한 검사관인 그들의 책임자입니다.
두 사람은 전지가위로 일하기 시작하더니, 다음엔 다른 연장들로 심고 다듬고 자르고 베고 합니다.
노부인이 열 시에 와 보니,
그들이 막 자기 강낭콩 쪽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강낭콩의 여린 잎들이 위로 뻗어 나와 있습니다.

강낭콩은 줄을 벗어나 있습니다. 정원의 조화를 망쳐놓고 있습니다. 하나의 틈 입자입니다.
노부인은 정원사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가슴을 조이며 꼼짝 않고 서서,
ㄱ러나 그들에게 달려가서 말을 할 엄두가 안 납니다....
노부인은 기다립니다. 마음은 계속 달려가고 있지만.
갑자기 그 감독관이 손가락으로 강낭콩을 가리켰고,
정원사 한 사람이 강낭콩을 뽑아서 땅에 내던집니다.

얼마 후, 노부인은 그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을 봅니다.
혼자 있게 되자 노부인은 다가가 강낭콩을 가만히 집어 듭니다. 강낭콩은 죽었습니다. 벌써 시들어 갑니다.
노부인은 강낭콩을 오랫동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노부인은 강낭콩 꼬투리를 몇 개 따서 꽃다발처럼 손에 듭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걸어 자기 방으로 돌아갑니다.
노부인은 공원에서 흙을 좀 담아 왔습니다. 그 흙을 다시 화분에 넣고 거기에 새 씨앗을 세 개 심습니다.
그 씨앗에는 노부인의 남은 희망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너무 늦지는 않습니다. 노부인은 압니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리라.
전처럼, 어쩌면 전보다 낫게. 그건 다만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노부인은 다시 한번 내다봅니다.
노부인은 세 씨앗이 잠자는 작은 화분의 흙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언제 옮겨 놓아야 하며 언제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지 잘 알 것입니다.
잠시 후면, 노부인은 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하늘에서 단비가 조용히 내립니다.
 비는 화분 위에 그리고 세 씨앗 모두 위에 조용히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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