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네덜란드)
후기 인상파의 화가이자,
정신분열 증세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네덜란드)
한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네덜란드 화가이다.
그는 화가로 활동하는 그의 생애에서 화가로서 누리고 , 갖어야 할 모든 것을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하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속에서 불운한 삶을 살았으며,
말년에는 정신분열까지 겹쳐 결국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예술가이다.
그를 말할때 정열의 화가,
사실 그는 순수하고,맑은 영혼과,섬세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동시대의 화가가 갖는 여성편력이나,
깊숙한 사생활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빈센트가 갖는 열정적 예술혼의 화가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상처받은 영혼, 자살을 통해 자유를 얻은 화가, 일생 가난과 고통속에서 살아온 삶,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술에 대한 열정,독창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화가등....
반 고흐를 논할땐 왠지 가슴이 애잔한 안타까움과 답답해져 옴을 항상 느낀다.
고흐가 평생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네살 터울의 친동생 테오와
19년간에 걸쳐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보면 너무나도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예술가로서의 갈등이 하나도 남김없이
솔직하게 표현된 고흐의 편지는 무려 668통이나 된다.
이를 계산해 보면 한달에 평균 두통씩 테오에게 보낸 셈이다.
신학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고흐는 27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동생 테오에게 뎃생책과 그림 물감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 이후 고흐는 죽을때까지 테오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았으며,
순수한 영혼의 시각을 통해 사람과 대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냈다.
그러나 고흐는 그림이 팔리지 않아 늘 가난한 화가의 신세를 벗어날수 없었다.
그가 돈을 받고 팔았던 유일한 그림은 그가 죽기 일년전 ,
<붉은 포도밭>이란 작품으로 400프랑에 팔린 그림이 유일하다.
그러니 그가 평생 가난과 고독에 시달렸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평생 괴롭히는 커다란 고통중의 하나였지만 ,
이는 당 시대 진보적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앞서가는 자들이 겪는 아픔이랄까?
하여간 그 시대의 예술 보다는 한참 앞을 달리는
고흐의 예술을 당시의 예술 애호가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흐의 삶은 가장 비극적인 예술가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그림속에 나타난 빛나는 색채와,
해맑은 영혼으로 그려진 불꽃같은 정열의 터치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또한 고흐가 쓴 편지가 역시 감동스러운 것은 화가이면서 음악과 사람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예술을 뜨겁게 불태운 인간적인 그의 모습이 그의 글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리라......
(스크랩)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1872년 7월 21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으로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은 고뇌를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1874년 1월
산책을 자주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다.
화가들중에는 좋지 않은 일은 결코하지 않고,나쁜 일은 결코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
1879년 8월 15.
이번에 네가 다녀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급히 편지를 쓴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하고,예전처럼 편지를 띄우지도 못했지.
죽은듯 무심하게 보내는 것보다,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정말 죽게될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880년 7월
“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다. 그동안 당연하게든 부당하게든 손상된 명성,
가난, 불우한 환경, 역경 등이 그를 죄수로 만든다. 이 감옥이란 편견, 오해,
치명적인 무지, 의심, 거짓 겸손 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감옥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
이 감옥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서 인생도 다시 태어난다.”
1881년 11월 10.
이 사랑이 시작될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 자신을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한 일이지.
사랑에 빠질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은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1882년 5월 /3 ~12.
길을 잃고 헤매고 임신한 여자.
하루치 모델료는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고 내 빵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녀와 그녀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수 있었다.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게 힘들었지만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나는 좋은 모델을 가진 덕분에 뎃생에 진전이 있었다.
1883년 3월 21 ~ 28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기 어렵다.
인물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한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 ,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 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에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하며,가슴을 찢어 놓을듯 텅 빈 여백을 우리앞에 돌려 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5년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븟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붓이 그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년5월 ~ 6
우리 같은 사람은 아프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아프면 방금 죽을 불쌍한 관리인보다 더 고독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있고, 집안 일을 돌보면서 바보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 하고 홀로 지내면서 가끔은 바보처럼 살고 싶어한다.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 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는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르지
1888년 7월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따라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성의 없이 급하게 본거라고 말해 주어라.
요즘은 너에게 그림을 보내기 위해서 조금씩 손을 보고 있는 중이다.
<수확>을 그리는 중에 밭에서 직접 수확을하고 있는 농부보다 결코 편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나는 늘 두가지 생각중 하나에 사로 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1888년 9월 17.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쓴후
태양이 비치는 정원 그림을 그리러 나가서 작업을 마쳤다.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새 캔버스를 가지고 나갔고,
그것도 끝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펜을 들었다.
1889년 1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둬 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아야 할 그림이 여기 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너 하나 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삶은 이런식으로 지나가 버리고,흘러간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번 가면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때,겁이 난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 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괴로워하는 나 자신,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할려거든,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거든,
나와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빈센트, 당신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 1879년 10월 15일 ―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9월 작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고흐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고흐는 사흘 밤, 잠도 자지 않고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혼신을 다한 걸로 알려지고 있지요.
이 카페는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토론장이었으며 주정꾼들의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답니다. 고흐는 “나는 간혹 낮보다는 밤이 더 생동감이
있어 색채가 넘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일상적 삶의 공간이 회화의 주제로 자리 잡은 건 인상주의 시기에 들어와서
부터라고 합니다.
<해바라기> 1887년 ~ 1889년 사이 작
한 예술가의 대표작은 그 사람의 이미지를 상징하는데 고흐에게 있어, <해바라기>가 그랬습니다.
1887년부터 1889년 사이에 고흐는 모두 11점의 <해바라기>를 그렸다고 해요.
파리 시절에 그린 <네 송이의 해바라기>는 활짝 핀 해바라기 꽃잎이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해서 정열적인 매력을 전달하고 있기도 하지요.
원래 해바라기는 색채나 생김새로 볼 때 이글거리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큰 꽃인데,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특히 원시성의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며 시각적인
율동까지 화면에 개성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입니다.
아무래도 고흐의 “정열적” 이미지는 해바라기 연작에서 비롯되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위의 노란색 배경의 <해바라기> 그림은 고갱이 마음에 들어 했던 작품으로 “빈센트의
양식을 보여주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붓꽃, 아이리스Irises> 1889년 작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생 레미Saint Remy에 있는 가톨릭 정신요양원(원래는 수도원이
있던 건물)에서 1년간 입원할 때 요양원 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
받게 됩니다. 그때 요양원의 정원에 한창 피어나고 있던 <붓꽃, 아이리스>을 강렬하고도
선명한 색채로 표현해서 그렸는데요,
고흐는 이 <붓꽃>이 사악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자연의 형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서, 그 의미를 화폭에 담고자 노력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고흐가 귀를 자르게 된 사연 ―
고흐는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이 모여, 예술과 그림에 대해 마음껏 토론하고 예술의 미래를 변화시키며,
최고의 가치가 돈이 아니라 예술적 창의성이라고 믿는
예술가의 공동체를 꿈꿔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개성은 다를지라도 자신이
좋아했던 고갱을 우선적으로 마음에 두었겠지요.
마침 태양을 따라서 남프랑스로 옮긴 고흐는, 벗인 고갱에게도 남프랑스에 올 것을
권유하여 그의 청을 받아들인 고갱이 오게 되자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죠.
그러나 두 사람은 원래 성격과 생활방식이 다르고, 예술관도 달랐기에 자연히 갈등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고갱은 금전적인 면에 집착이 있었던 듯하고
게다가 고흐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다.” 이렇게 은근히 무시하며
자신의 예술적 우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두 사람은 심하게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로 정신적인 발작을 일으킨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불행스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군요.
“자신의 그림을 혹평하는 자의 말이 듣기 싫어 잘라버렸다. 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흐의 말년기 작품들에서 ‘녹색’이 주조主調를 이루며 화면에 나타납니다.
이 시절, 그는 녹색의 매력에 푹 빠진 듯 적절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하는 연출 능력을 보이죠.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혹은 치료 중이라서 정서적 안정을 위해, 힐링 컬러
(Healing Color)라고 할 수 있는 색감인 녹색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처를, 자연의 대표적인 색
인 녹색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녹색은
시각적으로 긴장되거나 상처받은 마음을 이완하고 치유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림 배경에 일본 후지 산이 보이는 <우끼요에>를 그려 넣었군요. .....
*******
고흐에게 끝없이 따라 붙은 가난의 굴레가 그를 얼마나 괴롭혔으며,
외로움의 몸부림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했는지를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그가 보여준 자기 성찰의 노력,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나타나기도 해서 그의 인간성을 볼 수 있다.
동생 테오에게 모든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테오에게 받는 경제적 도움에 그는 항상 미안해하고 있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고흐는 작가로 활동한지는 불과 8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27 살의 나이에 뒤늦게 시작한 화가의 길이었지만,
그가 37 살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800 여점의 유화와,1200 여점의 소묘 작품을 남겼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화가로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에 임했는지 알수 있다. 물론 화가 마다 다르지만,
다작의 화가일지라도 8 년여의 세월동안 2000여점의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인 것은 틀림없다.
그가 이렇게 많은 작업량을 보인 이유는 스스로의 운명을 예견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의 편지속에서 그가 스스로의 운명을 예견한 면도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총기의 활발한 의식을 스스로 강조하며 작업에 임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면모를 그의 편지를 통해서 알수 있듯이
스스로에 대한 혹독한 채찍질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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